1.“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백강 조경한선생 장례식이 11일 사회장으로 엄수됐다”는 짤막한 내용이 1993년 1월초의 신문에 실린 바 있다. 白岡 趙擎韓, 아흔셋의 나이로 해방을 맞이한 지 48년이 지난 뒤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 그는 무엇보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음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올해로 임시정부수립 80주년을 맞는 광복절을 즈음하여 우리 지역에서 출생한 조경한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았으면 한다. 친일파 논쟁이 아직까지도 끊이지 않은 상황에서 올곧은 민족정기를 되새겨보기 위함이다.
2. 일제에 유린된 조씨 제각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 한동마을 옥천조씨 제각에 일본군 수비대가 들이닥치던 날. 당시 아홉 살 어린나이였던 조경한은 제각을 차지한 일본군에 의해 조부가 내쫓기고 의병들에게 고문을 당하고 총살을 서슴지 않는 만행을 직접 목격한다.
일제침략의 어두운 그림자가 조선의 남도땅에 짙게 드리웠던 20세기 벽두에 그의 삶은 그렇게 시작하였다. 그것이 그를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물론 스무살의 젊은 나이에 삼일운동을 직접 보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할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순천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퍼진 만세소리가 그의 민족의식을 흔들어 깨운 것이다.
국내활동에 한계를 느낀 그는 부인과 삼남매를 뒤로한 채 유학을 핑계삼아 중국으로 건너갔다. 북경에 도착한 그는 계명학원 법정과에 등록하였으나, 선배 독립운동가인 申采浩와 李天民 등이 이끄는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하였다. 허나, 북경생활은 그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과 싸우기보다는 독립운동가들끼리 치열한 논쟁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 후반 그는 만주를 향해 출발하였다. 만주벌판의 혹독한 추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오직 독립투쟁에 전념하겠다는 일념으로 북경을 떠난 것이다. 그의 만주활동은 대종교 계통의 倍達靑年會와 倍新學校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동만주와 북만주를 기반으로 결성된 한국독립당에 참여함으로써 본격적인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한독당의 지도자였던 홍진 이청천 신숙 등의 지도아래 선전위원장을 맡아 일하였다. 당시 한독당은 民本정치 · 勞本경제 · 人本문화 등 3本정책을 펼치며 수만명의 당원을 확보할 정도로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였다.
3. 세월에 묻힌 대전자 대첩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였다. 이에 한국독립당은 긴급회의를 개최하여 모든 黨力을 군사활동에 집중하기로 결정하고서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조경한은 수백명의 「유격독립여단」을 이끌고서 중국군과 연합하여 약 2년동안 100여 회의 크고작은 전투를 벌였다. 이들은 雙城堡 · 鏡泊湖 · 四道河子 · 大甸子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특히, 대전자전투는 한국독립군 항전사상 최대의 전과를 거두었다. 함북 나남으로 귀환하는 일본군 1,300여명 규모의 1개 연대를 격파한 것이다. 너댓시간동안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일본군 사상자는 적어도 130여명이나 발생했던 반면에 독립군은 소총 1,500여정, 군복과 담요 수천점, 군량 200여 마차, 박격포 등 10여문 등 실로 막대한 군수물자를 노획했다. 청산리대첩에 버금갈 정도의 대승을 거두었으나, 대전자대첩은 현재까지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
조경한은 그후 낙양군관학교의 한인특별반에서 정훈교관을 맡아 독립군 간부의 양성에 주력하다가 1937년 중일전전쟁이 터지자 조소앙 엄항섭 홍진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적극 추진한다. 그 결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가 결성될 수 있었다. 이들은 좌우세력의 통일전선 형성에도 노력하였으나, 성사되지는 않았었다.
임시정부가 조직과 진용을 확대하면서 조경한을 의정원 의원에 선임하였다. 그가 정식으로 임시정부의 일원이 된 것이다. 또한 그는 1940년 5월에 임정의 여당인 통합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그는 1940년 9월 임정내의 군사조직인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주도하였다. 그는 광복군총사령부의 주계장 · 총무처장 대리 · 경리처장겸정훈처장 등을 연이어 맡아 광복군의 체제정비에 기여하였다. 그후 임정의 군사관련 직책을 사임하고 의정원의 의원활동에 전념하였다.
1944년에 들어서면서 조경한은 한독당 중앙상무집행위원겸 훈련부장에 지명되었으며, 2월에는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에도 그는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내공작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개헌기초위원 · 국무원 비서장 등을 맡기도 했다. 그가 조국의 광복에 대비한 구체적인 계획의 수립을 주관하였던 것이다.
4. 독립지사 조경한을 기억하라
1945년 조국광복과 더불어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다. 이후 조경한은 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과 독립유공자협회장 등을 번갈아 맡아 민족정기의 확립에 진력하는 한편, 자신의 지난날과 임정의 역사를 글로 남겨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였다. ꡔ백강회고록ꡕ(1979)과 ꡔ대한민국임시정부사ꡕ(1991)가 그것이다.
허나, 광복과 대한민국의 정부수립 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가 태어난 생가는 퇴락하기 이를 데 없으며, 그가 살았던 집은 이미 무너져내려 잡초만 우거져 있을 뿐이다. 그가 어려서 공부했던 제각도 이젠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간신히 버티고 있다. 조국의 독립에 일생을 바친 민족지사를 위한 배려는 그가 태어난 마을의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표지석이나 흔한 돌비 하나라도 마련하였으면 하는 간절한 생각이 맴돈다. 이것이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독립운동가를 위한 배려일까?
* 白岡 趙擎韓 略傳 ; 1900. 7/13(음) - 1993. 1. 7(양)
- 1900년 7월 13일(음력) 순천시 住巖면 閑洞에서 廷恂(호 愚谷)의 둘째아들로 출생, 호는 白岡, 異名으로 安勳, (安)一靑, 趙鍾鉉 등. 본관은 玉川, 漢學 수학.
- 1921년 만주 독립단의 국내 지하공작연락원으로 활동.
- 1924년 출국, 북경의 계명학원 법정과 수학, 李天民과 申采浩 등과 활동.
- 1926년 가을 만주 이동, 「倍達靑年會」 · 「倍新學校」 등에서 교민의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활동.
- 1930년 동북만주 지역에서 한국독립당의 창립에 참여, 李靑天 柳東說 金學奎 등과 같이 활동.
- 1931년 만주사변후 이청천 黃學秀 등과 한국독립군을 일으켜 동북만주 각지에서 일군과 100여 회의 전투를 벌임.
- 1933년 한국독립군은 寧安縣 · 大甸子 전투에서 크게 승리.
- 1935년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혁명당이 통합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할 때 윤기섭 이청천과 한국혁명당 대표로 참여.